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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 헨로 길, 걷는다는 것 (시코쿠, 순례길, 사색여행)

by hapt2732 2025.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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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찰

 

시코쿠 헨로 길은 일본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총 1,200km의 장거리 도보 코스로, 단순한 여행이 아닌 수행과 사색의 길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찰과 자연, 마을과 사람을 잇는 이 길은 걷는 자의 내면을 비추는 깊은 여행이 됩니다.

시코쿠라는 섬, 순례의 시간 속으로

일본 남서부에 위치한 시코쿠는 비교적 조용하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섬입니다. 이곳을 따라 이어지는 ‘헨로길(遍路道)’은 1,200여 년 전 고보 대사 구카이의 발자취를 따르며 88곳의 불교 사찰을 순례하는 길입니다. 단순히 종교적 목적을 넘어, 이 길은 많은 이들에게 삶을 되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으로 의미를 더해 왔습니다. 전체 코스를 완주하려면 도보 기준 약 40일이 소요되며, 일부 구간만 걷는 여행자도 많습니다. 시코쿠는 산과 바다, 논과 마을이 조화롭게 이어져 있어, 걷는 동안 자연의 풍경이 배경이 되고 사찰은 마음의 쉼표가 됩니다. 섬 전체를 한 바퀴 도는 헨로 길은 물리적 거리보다 감정의 거리를 줄여주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도시의 소음은 멀어지고, 자신과의 대화가 가까워지는 길 위에서 사람들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코쿠라는 섬은 그 자체가 커다란 사색의 공간이며, 순례는 종교적 수행이 아닌 인간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로 이어집니다.

순례길, 삶을 돌아보는 이정표

헨로길의 상징은 88개 사찰입니다. 각각의 사찰은 번호와 이름, 고유한 배경을 갖고 있으며, 길 위에 점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이 사찰들을 차례로 찾으며 도장을 받는 ‘납경’은 여행자에게는 작은 의식이자 스스로의 기록이 됩니다. 어떤 사찰은 바닷가 절벽에, 또 어떤 곳은 숲 깊은 산중에 자리해 있어 그 자체로 걷는 즐거움이 됩니다. 사찰마다 만나는 풍경과 분위기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멈춤’입니다. 많은 여행자들은 이 멈춤의 순간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고요한 공간에서 짧은 명상이나 기도를 올립니다. 신앙이 없더라도 헨로 길은 그저 자연과 건축, 전통과 시간이 어우러진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집니다. 일본 현지에서도 고령의 순례자, 젊은 직장인, 외국인 여행자 등 다양한 이들이 이 길을 찾습니다. 도보로 사찰을 찾는 이들을 위한 숙소와 안내판, 간식과 음료를 건네주는 ‘오 세와’ 문화도 여전히 남아 있어 길 위의 따뜻함을 더합니다. 이 모든 요소는 순례를 여행 이상으로 만들어주며, 각자의 이유로 걷는 이들의 이야기를 더 깊고 진하게 만들어줍니다.

사색여행, 걷는 시간이 주는 내면의 변화

헨로 길은 누구나 쉽게 도전할 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길이는 물론이고, 도보 여행에 필요한 체력과 인내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길의 가치는 바로 그 느림과 고됨에서 시작됩니다. 하루 종일 걷고, 해가 지면 잠들고, 이른 새벽 다시 걷는 생활은 도시에서의 빠른 일상과는 전혀 다른 리듬입니다. 그런 일상이 며칠 지속되면, 걷는 이의 마음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꽃 한 송이, 길가에서 마주친 고양이, 어느 사찰 앞에서 조용히 울리던 풍경소리가 마음 깊이 스며듭니다. 걷는 동안에는 스마트폰보다 하늘을 더 자주 올려다보게 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하는 마음보다 지금 이 발걸음에 집중하게 됩니다. 사색여행이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인간적인 여행입니다. 목적과 성과를 내려놓고, 오롯이 자신을 향한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기도 합니다. 시코쿠 헨로 길은 이 사색을 위한 완벽한 무대입니다. 하루의 끝에 피곤함보다 평온함이 남는 이 길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과 다시 연결되는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걷는 만큼 얻어지는 위로, 그리고 멈추는 만큼 선명해지는 감각이 이 길 위에서 펼쳐집니다.

결론: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가 완성인 길

일본 시코쿠 헨로 길은 어디를 다녀왔는가 보다, 어떻게 걸었는가를 되묻는 길입니다. 각각의 사찰과 마을, 자연을 지나며 걷는 이의 감정은 달라지고, 그 변화는 걷는 행위 속에 축적됩니다. 이 길은 신앙의 길이자, 인간의 길이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 사색의 여정입니다. 시작과 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중간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게 채워지는 길 위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지를 조용히 돌아보게 됩니다. 헨로 길을 걷는 사람은 순례자가 되고, 순례자는 결국 자신을 발견하는 여행자가 됩니다. 시코쿠는 그런 여정을 가능하게 하는 조용한 섬이며, 헨로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길입니다. 목적지가 아닌 과정이 아름다운 여행, 그 길 위에 당신의 마음을 놓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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